Dunan's Eyes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블로그 이사중입니다.
쫓겨나는 신세가 거참.......
지금 보고 계신 블로그는 임시로 글을 옮겨 놓은 곳입니다.
집을 제대로 짓는 대로 바로 주소 올리겠습니다.^^
저두 어색해 죽겠습니다.-_-
2010년 12월 10일 금요일
25.
“선생님!!!”
잔디는 지후의 품을 파고 들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차가웠다.
잔디가 아는 지후라면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줄 텐데.
힘없이 떨어져 있는 두 손….미동없는 몸…
코를 찌르는 묘한 풀향기…
그것이 이유였을까?
잔디는 지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었다 ….
잔디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쫓자 그 끝에 놓인 흰 옷자락…..
푸릇한 풀 위로 부채마냥 펼쳐진 검은 머리칼은 이미 윤기를 잃고, 먼지마냥 바람에 흩어지는 그녀..
“…서현…..이제…끝났어.”
잔디는 지후에게서 뒷걸음질 쳐 떨어졌다.
‘이….이건…대체…’
그의 시선이 느릿느릿 잔디로 향했다. 하지만 초점 같은 건 맺혀 있지 않은 듯 비어있는 눈동자였다. 그제서야 잔디는 주위를 둘러 봤다.
멀리..몽생미쉘의 첨탑이 묵직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기적의 샘이라… 하지만 기적 같은 건 없는 것 같군. 네가 저렇게 눈을 뜨지 못하는 걸 보니…”
“서…선생님?”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끝났다고…..모두….”
목이 뻑뻑할 정도로 건조한 음성이었다.
그는 누워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이마를 가리고 있던 머리칼을 걷어내고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미안…무리하게 해서…”
그는 그녀를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뭔가…한참 어긋났다.
잔디는 자신이 들고 있던 붉은 고치를 내려다 보았다.
조금 풀려 있는 실 끝…..그녀는 조심조심 그것을 잡아 당겼다.
도르르….그녀의 기억들이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서현이 누워있던 풀숲에 무언가 꼼지락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구체로 몽알대던 그것은 점차 사람의 형태로 빚어지고 있었다.
온통 연녹색의 작은 그것은 잠자코 지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날아들 듯 그에게 다가서선 작은 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원을 이뤄줄 테니, 당신의 그 마음을 내게 줘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간이 갈렸다.
기억의 시작….
존재의 시작….
잔디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저것은 그녀의 시작이었다.
도르르…..또 하나의 기억이 풀려 나온다.
[가지마. 네가 가버리면 이곳은 지옥이 되어 버릴꺼야. 원을 잃어 버린 것들의 세상…제발…]
잔디가 냉정히 고개를 가로젓자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그 인간남자 때문이야? 그래서? 너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마음을 받기로 했어.”
[제발…..날 두고 가지마..]
잔디는 그녀가 잡은 옷자락을 뿌리쳤다.
지후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르르……그렇게 하나, 둘씩 기억이 풀려 나왔다.
그의 원대로 이뤄줬다.
하지만 마음을 얻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나서야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 섰을 때의 그 편안함이 생각났다. 과거의 익숙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미래를 보았다.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순식간에 고였다가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고치의 기억을 모두 풀어버리자 작은 구슬 하나가 손바닥 위에 남았다.
손가락으로 힘껏 눌러 으깨자 퐁…하고 터지면서 그녀를 감싸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어디선가 굳건한 손 하나가 그녀의 팔목을 잡아 끌었다.
“잔디야!!!!!”
왈칵 차가운 물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자신을 끌어 당긴 손을 쳐다봤다.
지후였다. 그녀의 지후였다.
그녀가 기억하고, 그녀를 기억하는 지후였다.
“네가 여길…어..어떻게…?
“사랑해요.”
“아….”
그녀의 입술이 그를 찾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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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적인 승부보다 검은 기사의 묘한 낯익음이 거슬렸다.
익숙했다. 몸짓, 어투….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누군가와…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황당한 상상을 떨쳐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그가 걷고 있던 호수는 달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그것이 거슬렸다.??
어라? 달 그림자가 꿈틀…..움직였다……?
물결의 반영이라고 보기엔 무리 있는 움직임이었다.
다시 꿈틀…..
그리고 점차 커지더니 그 안에 무엇인가 흐릿한 실루엣이 보였다.
조금씩 선명해지는 영형에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잔디였다.
그는 앞뒤 잴 겨를 없이 첨벙첨벙 호수로 뛰어들었다.
거친 파랑에도 달 그림자는 아무런 영향없이 더욱 커져갔다.
그가 달 그림자 속으로 손을 뻗자 그녀가 잡혔다.
따뜻했다.
손가락이 하나씩 얽혀 들어갔다.
단단하게 두 개의 손이 겹쳐지자 지후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그녀를 끌어 올렸다. 작은 바람에도 날아갈 듯 느낄 수 없는 무게감이었기에 현실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두 팔 안에 가두고 나서야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벼운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환상인 양…꿈인 양 하여,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몇번을 다시봐도 동그란 얼굴 하나가 두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 웃고 있었다.
놀라움보다 그리움이 먼저였다.
좀 전까지 머릿속을 파고 들던 검은 기사에 대한 생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환영이 아니길… 환영이 아니길….잔인한 밤이 선심 쓰듯 던져놓은 꿈 조각은 아니길…
“선생님….”
“너…정말..잔디.. 맞구나..”
그녀는 작은 머리통을 세차게 끄덕였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다시 서로의 입술을 찾아 들었다.
“엇!!! 잔디?”
이정의 놀란 목소리에도 둘은 떨어질 줄 모르고 서로를 탐했다.
주머니 속에서 작은 떨림이 시작되었지만 이정이 눈치채기엔 지나치게 미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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뻑뻑한 가슴께, 익숙치 않은 에스프레소 더블을 단숨에 들이킨 듯 진정되지 않는 심장.
직감적으로 그의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미친듯한 발걸음 끝에 그는 비어있는 고치를 발견했다.
“누구야!!!!!대체 누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 그 꿈에서 깰 수 없음이다.
무한의 반복으로 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꿈에서 감히…누가 탈출을 시도하겠는가.
아니 우선 그녀를 다시…
그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바닥을 갈랐다.
갈라진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2010년 12월 2일 목요일
24.
뭔가 설명할 길 없지만 묘한 느낌이었다.
끊임없이 따라붙는 시선 같은?
마치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된 기분?
왜 그런 생각이 드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에 아무리 살펴봐도 딱히 이상한 것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잔디는 읽고 있던 책을 쇼파 뒤로 던져 버렸다.
턱하고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이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뭘 기대하는 거지? 뭐라도 맞아서 다른 소리를 내길 바란 건가?
“병 인가보다..”
주변에 사람이라도 있으면 도끼병이라고 하겠다.
이 집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잔디 그녀 자신과 그뿐이었다. 그는 서재에 있었고, 거실엔 그녀 혼자뿐이었다.
커튼마저 빛 샐틈없이 닫아놓은 이 곳….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껄끄러운 느낌은 여전했다.
“뭐해?”
“아…아니요.”
그가 바닥에 던져진 책을 집어 들었다.
“이거 재미없나 보지?”
“아…아뇨…”
솔직히, 읽고 있지 않았다.
눈은 활자를 꿰었지만 머리는 단 한 글자도 들여놓지 않았다.
그저 거북한 이 느낌을 피해보고자 뽑아 든 도구일 뿐이었으니까.
“재미없을 만 해.”
“네?”
“시뮬라시옹…던질 만 하다구.”
그러고 보니 책제목 조차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그제서야 추상적인 색조가 두드러지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재미없어서 던져놓았던 책이니까 잔디도 던져도 괜찮아.”
그는 책을 책장에 꽂아 넣었다.
“재미있는 거 골라줘?”
“아…네…”
“어디 보자. 소설? 아님 수필?”
그의 손가락은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을 피아노 건반 누르듯 하나씩 짚고 있었다.
책제목을 읽는 듯 그의 입술은 슬쩍슬쩍 고른 이를 내보였다.
낯이 익었다. 책제목을 짚어가는 그 손가락이…
중얼대듯 달짝이는 그 입술이…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치 곰 씹고 있던 노랫가락이 우연찮게 라디오에서 나온 듯한
무언가 의도되어 그녀의 앞에 순서대로 놓여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지금은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아요.”
책을 뽑아내고 있던 그의 손이 딱 멈췄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줬다.
“그럼 바람이라도 쐬러 갈까?”
“응….글쎄요?”
그녀의 미적대는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손을 잡아 끌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그의 손은 따뜻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밤이 줄어가고 있었다.
폐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입에선 단내가 났다. 들고 있는 레이피어는 천근의 추처럼 축축 늘어졌다.
밤은 휴식의 시간이었다.
밤은 사람들의 눈을 감기고, 꿈꾸게 하는 시간이었다.
밤은 아름답던, 흉하든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어둠으로 보담는 아량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서현에게서 벗어난 그날부터 밤은 잔인한 이빨을 드러냈다.
그들에게 한 틈의 꿈도,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밤은 그들의 다리를 감고 놔주질 않았다.
잘라내도 잘리지 않는 긴 촉수로 그들을 감아 어둠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쉼 없이 검을 놀려야 했다. 그 긴긴 밤을 가로질러야 했다.
밤이 허락한 것은 오로지 눈뜬 악몽뿐이었다.
수도 형태도 헤아리기 힘든 사령들이 쉼 없이 공격해 육체를 고단하게 하기도 또 모습을 바꾸어 상상조차 끔찍한 환영으로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이정이 마악 눈앞의 사령을 베어냈을 때, 그제서야 숲 가운데를 찢고 들어서는 긴 아침 빛에 땅속에서 스멀스멀 솟아오던 검은 덩이들이 츳츳츳…괴이한 소리를 내며 흩어버렸다.
“하아..하아…..”
이정은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 앉아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꼬꾸라져 잠이 들고 말았다. 꿈조차 사치인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휴식이었다.
다시 눈을 뜨자 해는 이미 머리 위에 있었다.
“일어났어?”
뭔가 쓰윽하고 이정의 시야를 채웠다.
마악 불에서 꺼내온 듯 자글자글 기름이 고깃덩이의 표면에서 끓고 있었다.
저 괴물 같은 놈.
벙싯거리며 웃고 있었다.
근육통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데. 저놈은 웃고 있었다.
이정은 그대로 지후의 다리를 걷어 찼다.
“아야!!! 왜?”
지후가 건넨 음식을 신경질적으로 씹기 시작했다.
“왜 그래?”
모를 거다 이놈아. 평생!!!
너 같은 올빼미 과는 절대로!!!
머리 반쪽을 드러낸 듯한 저릿저릿한 두통에 얼굴이 팍 구겨졌다.
입술을 삐쭉 내미는 이정을 보면서 지후는 나직하니 웃음을 흘렸다.
지후는 이정의 옆에 앉으며 어깨를 걸었다.
“너의 귀여운 아가씨께 물어 봐. 가온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트윙은 지후가 가까이 오자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까마득히 멀었다는 건 지후도 이정도 잘 알고 있었다
지후 나름의 트윙에 대한 생존확인이었다.
“귀여운 아가씨? 크크 귀엽기만 하지.”
이정의 말에 주머니 속이 요동쳤다. 밤새 사령들과 사투로 고단할 텐데도 가열차게 움직여댔다.
잘근잘근 씹자 육즙이 입안 가득 고였다. 고된 뒤끝에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음식물이 주는 만족감은 이정의 기분을 최상으로 끌어 올렸다.
만족스러울 만한 포만감에 신경이 조금씩 느긋해지자 이제는 마음이 조금씩 급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밤이 오기 전에 많이 걸어둬야 했다. 그것이 이 끔찍한 악몽을 줄이는 길이었다.
“죽음에서 다시 부활한 언령의 약속이니 그것을 무로 돌리려면 다시 죽음을 찾는 수 밖에 없어.”
트윙은 수상한 미소를 흘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명계의 문을 지나면서 그 약속은 속박이 되었고, 세계를 뒤집을 만큼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지후에게 짊어 지어진 그 무게를 되돌리려면 다시 명계의 문을 찾아야 했다.
명계의 문…이 세계의 중심 가온이었다.
“끙차…..이제 슬슬 또 움직여 볼까?”
짧은 휴식이었지만 효율은 높은 편이었다.
밤이 그들을 찾기 전에 멀리 가야 했다.
어둠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거나, 아니면 밤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빛에 따라 색을 바꾸는 가는 줄이었다.
준표는 미끄러지듯 방사형의 줄을 따라 고치로 다가섰다.
반짝이는 영롱한 빛의 고치 안에 그녀가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잠들어 있었다.
코 앞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실들이 아니였으면, 사람의 모습을 깎아 놓은 인형이라고 말해도 곧이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게 박제처럼 누워 있었다.
준표의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그 손가락은 머리길을 따라 그녀의 목덜미까지 내려왔다.
미약하게 움직이는 맥은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흘러 들었다.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거니…”
그녀는 미소라도 짓듯 입가가 살짝 당겨졌다.
준표의 입 끝도 따라 올라갔다.
“기왕이면 최고로 행복한 꿈을 꾸어라. 네가 그 꿈을 다 꾸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거다.
그리고 그 끝에 서있는 내게 오면 된다. 그래..내게…”
준표의 손끝은 그녀의 턱 선을 따라 올라가다 입술에 머물렀다.
슬쩍만 눌러도 촉촉하게 물기가 베어나올 듯 탐스러운 입술이었다.
끈적한 욕망을 담은 손끝은 그녀의 입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이 그의 입술은 어느덧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녹아 내릴 듯, 부서져 버릴 듯, 모래알 마냥 흩어져 버릴 듯했다.
호흡을 타고 그의 안으로 들어선 그녀의 체향에 숨이 가빠졌다.
지금 가지고 있다.
그녀의 의식이 어떤 세계를 떠돌든,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의 것이었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넌, 내 거야. 이제…”
할 수 만 있다면 그냥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었다.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녹아버려 완벽하게 자신의 것이 될 듯싶었다.
군침이 돌았다. 턱 양쪽이 빡빡하도록 그녀가 맛있게 보였다.
“아….미쳐가는 구나 구준표….”
미쳤다. 제대로 미쳤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온 것부터 미친 짓이다.
단지 그녀 하나 갖겠다고, 인간을 버린 것도 미친 짓이다.
그 무엇보다 더 큰 미친 짓은 그녀 하나밖에 그 어떤 것도 보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십년지기 친구도, 가족도, 세상도, 그리고 힘을 얻는 조건으로 걸었던 언령의 약속까지도.
하지만 보고 싶었다.
감정가득 아롱대는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를….
언젠가 지후를 쳐다보던 그 눈빛을 가지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준표는 자고 있는 그녀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갑주가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다녀올게. 모든 것을 끝내려면..그게 어떠한 것이 되었든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가 한발 뒤로 몸을 무르자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 까맣게 몰려와 그대로 몸을 감아 사라져 버렸다.
사라져버린 어둠 끝에서 붉은 거미 한 마리가 줄을 타기 시작했다.
까캉!!!!
두개의 검이 맞붙는 날카로운 소리가 숲을 울렸다.
“젠장!!! 넌 누구야!!!”
형태조차 알아 보기 힘들 정도로 검은 갑주 안의 사람이 웃었다고 생각했다.
손목이 저릿저릿해왔다.
젠장!!!
수면부족에 체력고갈…..최악의 상황에서 강적을 만났다.
악몽처럼 떠돌던 사령들이 길을 만들 때 부터 뭔가 불안했었다.
그리고 이놈이 나타났다.
언젠가 어둠의 귀퉁이에서 맞붙었던 검은 기사.
지후의 검은 여전히 불안정한 형태로 넘실거렸지만 이때만큼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
여느 검보다 다소 긴 힐트(칼자루) 덕분에 안정감있게 체중을 실을 수 있었다.
빛으로 번뜩거리는 지후의 검..
그리고 그 빛을 잡아먹을 듯 덤벼드는 검은 검은 합을 계속할수록 기세좋게 타올랐다.
하지만, 그 누가 보기에도 승패는 확연해 보였다.
“형편없군.”
마지막 합에 지후가 나가떨어지자 그가 검을 돌려 검집에 넣으며 조롱하듯 내뱉았다.
“이런 것 따위가 문이라니… 문지기가 적어도 너보다는 즐길만한 상대가 되겠구나.”
“대체 원하는 게 뭐지?”
“너의 죽음.”
“뭐?”
“하지만, 이렇게 약해 빠졌을 줄은 몰랐다. 문지기에게 힘을 개방하는 법도 배우질 못한게냐?”
그의 기세에 잠시 흩어졌던 사령들이 꿈틀거리며 다가섰다.
“흥. 이런 것 따위와 비등한 실력이라니…우숩군.”
그의 손짓 하나에 거친 바람이 일더니 순식간에 사령이 흩어졌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주문은 꼬리를 달고 형태를 입어 작은 구슬이 되었다.
그는 그것을 지후에게 던졌다.
“가지고 있으면 사령 따위는 범접 치 못할 것이다. 다음엔 좀더 성의를 다했으면 좋겠군 윤지후.”
“너….날 아는 거야?”
그는 대답대신 지독히도 낮은 웃음을 흘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숨결이 이마를 간질이고 있었다.
살짝 실눈을 뜨자 그의 단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자?”
느닷없는 질문에 잔디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가 싶더니 그녀를 더욱 세게 품 안으로 끌어 당겼다.
“에? 아직 안 잤어요?”
“응……”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네가 깨어 있는데…잠이 올 리 없잖아.”
“피…내일 출근 안 해요?”
“응.”
“에?”
“하지 말까 봐. 그냥…이러고 하루 종일…아니 평생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라~~~그럼 난 누가 먹여 살리나?”
“그러게….적당히 먹어야 말이지….아무거나 먹는 것도 아니고. 이것 저것 따져서 골라먹으니, 우리 잔디 먹이느냐고 허리가 휜다.”
“엥?”
“먹보.”
“엥?”
“그래도 이뻐.”
“내가 무쟈게 먹고 데굴데굴 굴러 다녀도 예쁠 것 같아요?”
“응. 솔직히 지금보다 더 살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왜요?”
“널 안을 때마다 뼈가 잡혀서 부서져 버릴 것 같아. 맘 놓고 양것 안아 보는 게 소원이다.”
“얼랄라. 나 이래뵈도 통뼌데…”
“그럼….양껏 안아 봐도 돼?”
“칫. 이제껏 도만 닦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하네.”
“몸에서 사리가 서 말은 나올 거야. 널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넌, 내가 얼마다 도를 닦았는지 모르지? 처음엔 작은 꼬맹이에 불과했는데.
한 순간에 여자가 되어버려서 말야. 머리는 아닌데, 몸은 계속 널 쫓고 있고 말야.”
“누가 도 닦으랬나?”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이지? 무르기 없다.”
“에?”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잠옷단추를 급하게 풀어나갔다.
“아….저…그..그게 아니고..”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그의 서글서글한 눈은 웃고 있었다.
“무르기 없다고 했어.”
조금은 쉰듯한 허스키한 그의 음성이 그녀의 안쪽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린 듯 몸 안에서 정체 모를 것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그의 바쁜 손과는 달리 입술은 부드럽게 그녀를 탐해갔다.
그의 맨살내음..
평정을 잃기 시작하는 들숨과 날숨…
어느덧 가슴께로 들어선 다섯개의 손가락.
잔디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행복해?”
“응. 최고야.”
가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찬찬히 그녀를 살폈다.
“칫…….그래..좋아 보인다.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 광채가~~나두 얼른 시집이나 가버릴까봐.”
You must remember this
A kiss is still a kiss, a sigh is just a sigh
The fundamental things apply as time goes by
And when two lovers who
They still say, "I love you" On that you can rely
No matter what the future brings as time goes by
Moonlight and love songs never out of date
Hearts full of passion jealousy and hate
Woman needs man and man must have his mate
That no one can deny
It's still the same old story
A fight for love and glory
A case of do or die
The world will always welcome lovers
As time goes by
어느새 커피전문점에 흐르는 음악은 As Time Goes By로 넘어가 버렸다.
고전적인 음색이 폭삭폭삭한 솜처럼 소리의 충돌을 완화시켜준다.
“나…이 노래 좋아..”
“응? 뭐?”
“영화 두……흑백에 새로 색깔을 담아낸 최근 것두 좋고…흑백인 그 자체도 좋고…
요즘 영화가 가지지 못하는 낭만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그 시대 영화는…”
“이거 혹시…카사블랑카?”
“응. 그런데 비행장에서 말야….릭은 그녀를 보내야만 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손이 닿지 않을 곳으로, 다른 사람에게 떠나 보내는 것도 사랑일까?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그런 거….. 난 이해가 되질 않아. 넌 그럴 수 있어?”
“글쎄..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영화에선 잉그리트 버그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아니였어?”
“릭은…그녀를 보내고 행복했을까? 어딘가 살아있을 그녀를 상상하며 행복할 수 있었을까?”
“좀 전까지 행복해 죽겠다던 애가 갑자기 우중충하게 말야. 설마 내가 모르는 일이 있는거야?”
잔디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 아니 그녀를 보낸 릭의 코트자락에 건배~”
“뭐야~~그거…”
문득 그가…보고 싶었다.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그 사람이.
평생이라는 맹세로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히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그 사람이.
운명이란 것이 순탄치만은 않음을 알기에 생이 끝나는 시간까지도 놓고 싶지 않은 그 손을 가진 그 사람을…
톡톡..
뭔가 귀를 간질이는 느낌..
돌아보니 그곳에 그가 있었다.
“어?”
잔디가 돌아보자 함박 웃음을 짓는다.
자신을 가리킨 손가락이 잔디를 향하고, 이내 그 손가락은 손목의 시계를 가리켰다.
그리곤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이곤 바삐 사라졌다.
잔디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어? 뭐야 방금?”
“아….나 보고 싶은데 바빠서 그냥 간데.”
“뭐야~~~닭살!!!”
가을이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치자 잔디는 유쾌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리창에 손을 가져 갔다.
손가락을 쫘악 펴 맞춰봐도 넉넉한 모양…
이 손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감아 쥐면 손이 포옥 묻혀버릴 듯 커다란 이 손을…
겨울만 되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잔디의 손과는 달리 항상 따뜻한 그 손을…
손에서 놓질 못하는 연장 탓에 바닥에 굳은 살이 박혀 있지만..
이 손은 놀랄 만큼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녀를 놀라게 한다는 것을..
“아주 좋아 죽는 구나….어째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아. 아~ 배 아퍼!!!”
“응…완벽하게 행복해.”
딸깍….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정남향의 집답게 늦은 오후인데도 가득 햇빛을 품고 있는 집은 여전히 잔디의 눈을 부시게 했다.
커다란 통창 밖 테라스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의자..
거실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와 그의 사진들..
크림색 쇼파 위로 대충 던져진 몇 권의 책들…
그녀가 꿈꿔오던 공간이었다.
너무나도 완벽해서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로…
공간 뿐만 아니 였다.
주위의 모든 것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 그 자체였다.
버스를 타러 나서면 두어 걸음 걸은 것 같은데 어느새 정류장에 버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평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도 그녀의 제안서에 두말없이 OK사인…
무엇보다도….그가 보고 싶으면 여지없이 그녀의 눈 앞에 그가 있었다.
“꿈….같아…”
그녀는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을 내 뱉은 양 서둘러 입을 손으로 가렸다.
모래탑이 파도에 무너지듯 서서히 불안감이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어긋나기 시작했다.
완벽한 행복이…
불안감이 터질 듯 꽉 차버렸을 때…
마침내 찾아온 이질적인 느낌, 돌아본 그 곳엔
마치 그림이라도 찢어낸 듯 그녀의 공간이 조금 뜯겨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은색으로 빛나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정체 모를 것이 놓여 있었다.
“이게…..뭐야…..??”
그녀가 그것을 집으려고 하자 어디선가 긴 손가락 하나가 나왔다.
창호지를 뚫고 나온 듯한 그 손가락은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것을 도르르 굴려 버렸다.
다시 집으러 하자 손가락은 좌우로 까닥거리며 그녀를 저지했다.
손가락은 두개가 되고, 다시 네개가 되고 종래에는 여덟개의 다리를 가진 붉은 거미로 화했다.
지독히도 비현실적인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아니…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꿈이다.
지독하게도 생생한, 현실과의 경계가 사라진 꿈이란 것을 그녀는 이미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꿈이란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깨기 싫어서…
이곳을 나가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무거운 부재에 몸서리 칠 것을 알기에
거짓이긴 했지만 행복했기에.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거미는 그녀의 공간에 실을 자아 씨실과 날실을 엮어 내기 시작했다.
“싫어……”
그녀의 얼굴 가득 어느덧 눈물이 넘쳐 내렸다.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
거미는 그녀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더욱 빠르게 움직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갔다.
“그를…..두고 갈 수 없어.”
아니..처음부터 존재치 않았다.
이젠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 그…
그녀의 기억 안 자투리를 긁어 모아 만든 인물이라는 것을…
누군가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사랑해…..”
기억속의 목소리….
끝까지 놓을 수 없었던 기억..
그녀는 그를 쳐다 보았다.
그가 미소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봄볕처럼 따뜻하게…
어느덧 그녀의 손 안에 그것이 놓여 있었다.
“네가 찾아 줄 꺼 잖아. 잊지 않고…나를..”
“………….나…잊어 버릴 꺼 라고요…..여기서 나가면..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세상 끝이라도….나를…”
“그것이 네가 이곳에 온 이유……그렇지?”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그녀의 눈가의 눈물을 거뒤냈다.
“사랑해…..”
숨이 턱턱 막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상실된 기억의 무게가 그녀를 눌러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미가 짜 놓은 출구를 손으로 주욱 잡아 뜯었다.
갑작스레 바뀐 주변환경에 그녀는 커다란 눈만 꿈벅거렸다.
몸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고치를 뜯어내어 밖으로 나오자
붉은 머리의 여자가 그녀의 눈앞에 서있었다.
잔디는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자신을 현실로 인도해준 그 거미임을 알 수 있었다.
“나…도와줘요. 그 사람에게 갈 수 있게 해줘요.”
투명한 유리알처럼 감정없는 눈동자가 미소 지었다.
“기억은 돌려 줄 수 없어. 나까지 사령에게 먹혀 버리니까.
하지만 난 가끔 부주의 하게 그것을 흘리고 다기기도 하지….누가 줍던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그녀의 시선은 잔디 손안의 작은 그것에 향해 있었다.
“고마워요….”
“훗….고맙다는 말은 쉽게 하는 게 아니야. 저 태피스트리를 타고 가.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꺼야. 그리고 나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되겠지.”
그녀의 작은 손짓에 벽에 걸린 현란한 태피스트리는 꿈틀거리며 하나의 정경을 만들어 냈다.
달빛 가득한 물가에 선 사내의 모습.
무심한 눈길을 수면 아래로 던지고 있는 그 옆모습.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은 손.
익숙했다.
금방이라도 피식 웃음을 흘릴 듯한 입술.
시원스레 뻗은 콧날…
숱 많은 깉은 눈썹…
그리고, 모습만으로도 전력질주를 끝낸 사람처럼 헐떡대는 자신의 심장도.
익숙했다.
그다…
저 사람이…..
나의 이유…
잃어 버리지 않아. 더 이상…..
그녀가 팔을 벌리자 태피스트리는 길을 만들었다.
잔디가 길을 타고 태피스트리안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그것을 떼어내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저렇게 좋아하니 왠지 미안한걸.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분이 문을 부수고, 이곳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니까.”
미로처럼 얽힌 길에서도 잔디는 자신의 길을 정확히 밟아 냈다.
가까워지고 있다.
그가….바로 눈 앞에 있다.
한걸음 딛을 때 마다 그녀의 확신은 신념처럼 굳어져 갔다.
고작 새끼 손톱만한 크기로 보이는 출구였지만 그 안에 그의 모습은 그녀의 온 각막을 뒤덮었다.
순간 그가 이쪽을 돌아봤다.
커지는 동공을 통해…그가 자신을 알아 봤음을 확신했다.
손을 뻗는 그….
거리는 단숨에 좁혀졌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
손가락 끝이 닿았다.
닿은 손가락이 서로 얽혀 들어갔다.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 열기가 전해져 왔다.
아릿하며 눈가가 따뜻해져 왔다.
“잔디??…….”
그리운 목소리…였다.